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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

[린신경염/린정] 금릉의 겨울 金陵之冬 for rument

金陵之冬





하늘에서 내리는 굵은 눈송이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금릉金陵의 겨울을 감싸 안는다. 하얗게 변한 마당을 내려다 보는 경염의 발 아래 자리한 나무로 된 마루는 차갑고 매끈하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자주 찾아올 수는 없었기에 사람을 시켜 매일 같이 쓸고 닦되 예전의 풍광風光을 잃지 않도록 신경을 쓴 탓일 게다. 종종 그러나 이제는 아주 가끔, 겨우 시간을 내어 비밀리에 찾아와 그가 보았을 풍경을 그대로 느끼고 돌아간다. 이미 한 번은 겪었던 죽음이라지만, 두 번째라고 해서 덜 아픈 것은 아니었다. 임수의 죽음을 기린 시간 동안 살아 온 매장소의 삶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떠나 보내게 되었기에 오히려 더욱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입 밖으로 하얀 입김이 토해진다. 무관으로 자라왔고, 황제가 된 지금도 무관의 피는 여전히 그의 맥박을 뛰게 만든다. 그렇기에 필요성을 느껴본 적도 없었고, 사용한 적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경염은 그 날부터 화로를 가까이 두었다. 딱히 불을 켜두지는 않는다. 단지 손가락 끝까지 저릿해질 정도로 차가워 질 때면 화로 테두리에 슬쩍 얹던 하얀 손을 기억한다. 타닥타닥 튀는 불꽃이 흩날리던 그 겨울 날을 기억한다. 매캐하게 피어 오르던 연기 탓에 내원內院을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 두고선, 추위에 맞설 털옷을 두르고 바르게 앉은 그 모습을 기억한다. 평생을 함께 커왔던 강건하고 활달하던 수아는 아니었어도, 바뀐 껍질로도 감추지 못 하던 명석함으로 빛나던 눈빛을 기억한다.


기억을 놓지 못 한다. 기억을 놓지 않으려 한다. 경염은 어느 것 하나 놓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기에 스스로의 의지로 기억하는 것을 택했다. 소택의 화로는 불이 꺼져 있지만, 제 주인이 어루만지던 그대로 매끈하게 자리하여 기억을 되살린다.




가뿐히 지붕 위로 날아오르는 인영은 익숙하게 이곳 저곳 위를 돌아 다닌다. 기와에 닿는 발 끝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곧장 다른 기와로 건너 뛴다. 마치 바람 그 자체인 것처럼 어떤 주저함도 없고, 그 무엇에도 걸릴 것 없는 움직임이었다. 적어도 누군가가 그를 부르기 전까지는.


“비류!”


멈칫했던 발이 다시금 날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기와가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걸 멈추지는 못 했다.


“비류! 어디 있는지 다 안다. 얼른 내려와. 안 그럼 소형님한테 이를 테다.”

“…소형님 없다는 거 이제 나도 다 안다, 뭐.”


결국 땅바닥에 내려온 청년은 어릴 적과 변함 없는 뚱한 표정으로 숨기고 있지만, 내심 울컥하는 것이 다 보였기에 린신 역시 쓰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이런 농담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입 밖에 내본 것이었는데, 의외로 비류보다도 자신이 더 상처 입은 것처럼 느껴진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전장에서의 마지막 모습보다 이 곳에 오기 전 비류와 셋이 지내던 시절이 아직도 뇌리에는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비록 그의 뜻이었어도 그렇게 금릉으로 보내서는 아니 되었다. 임수로서 정왕의 곁에 남고 싶어하던 간절함을 외면했어야 했다. 잠시 굳게 닫혀 있던 린신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비류, 어디 놀다 와도 좋지만, 지붕 위는 그만 두거라. 이제 너도 예전의 그 소년이 아니니까.”

“각주도, 예전과는 달라.”


웃으며 말을 하지만 린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비류가 불퉁하게 한 마디 툭 던지고는 등을 돌려 사라진다. 비류 앞에서는 예전처럼 밝은 모습만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비류도 다 컸나 보다. 아니 그의 곁에서 계속 자라나던 것이 그의 죽음에 이르러 어른이 되었을지 모른다. 마음은 이미 그 때 다 자라 버렸나 보다. 이제는 비류마저 곁에서 보내줄 때가 된 것 같다. 쓸쓸함을 닮은 서운함이 발길을 제맘대로 움직이게 하였다.


제 두 발은 또다시 멋대로 움직여 이곳까지 데려왔구나, 린신은 눈앞에 나타난 소택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겉보기에는 변화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풍경 그대로였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그 때 그대로라니, 부지런히 쓸고 닦지 않으면 유지가 어려울 큰 집이다. 닫힌 대문 너머로 보일 풍경 역시 그 때 그대로일까. 린신은 저도 모르게 손을 얹어 서서히 힘을 주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은 몇 년 동안 닫혀 있던 놈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문 너머는 고요하고, 하얗게 내린 눈은 발자국 하나 없었다. 가림벽 너머 내원도 그대로일까, 저도 모르게 문을 하나씩 열고 안으로 향하는 린신의 손놀림은 점점 더 거침이 없다.


마침내, 내대문內大門을 지나 하얀 눈으로 뒤덮인 내원에 다다랐다. 그리고 기대하지도, 있어서도 안 될 이와 마주했다. 매장소가 내원을 바라보던 그 자리에 서 있는 기다란 망토를 두른 자는 린신이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던 사람이기도 했다. 저이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끌어 모아 임수로 삶을 마감하고자 했던 제 사람을 기억한다. 그럴 만큼의 가치를 지닌 사내이던가, 자신은 알 수 없었다.


“어찌 이곳까지 행차 하셨을까.”

“…그대야말로, 금릉에는 언제 온 것인가.”

“황상께서 알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니옵니다.”

“그 말투, 어울리지 않는군.”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폐하?”


린신의 이죽거리는 말투에 경염의 미간 주름은 더욱 깊어진다. 어찌 하여 갑작스레 이 곳에 나타난 것이냐. 스스로 기억하기를 원했으나, 이런 식으로 과거가 갑작스레 찾아오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곁에서 마지막을 지켜낸 자, 저 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수아는 다시 장수로 말 위에 올라설 수 없었을 터.


“…린각주…”

“어째서 여길 그대로 뒀지?”

“기억하기 위해, 잊혀지게 두지 않으려 하였소.”

“어차피 매장소는 잊혀질 운명이었어. 그대로 떠났더라면, 잊혀졌어도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린신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내내 그리워하다 결국 저이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던지다시피 한 제 친우의 선택이, 마음이, 자신이 잡을 수 없고 돌릴 수 없는 길이 오로지 경염을 향한 것이라는 걸 억지로 잊으려 하였다. 무시하려 하였다. 겨우 집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그가 돌아오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슬픔을 가둔 먹먹한 눈빛을 하고 있다고 하여 자신은 쉽게 인정할 수 없다.


성큼성큼 내원을 질러 정방의 마루 위로 우뚝 올라섰다. 먼지 하나 없이 닦인 마루 위까지 눈과 흙으로 엉망이 된 신을 신은 채 올라 선 린신이 경염의 눈앞에 섰다. 황제보다 시선이 높아서는 아니 될 노릇일 테지만, 경염도 린신도 그걸 신경쓰지는 않았다.


“경염, 나는 자네가 모르는 매장소로서의 13년의 삶을 알고 있지.”

“…”

“이런 식으로 기억할 수 있는 건, 겨우 2년여의 금릉에서의 삶일 뿐. 내 친히 폐하에게만 특별한 거래를 할 생각이 생겼는데, 어때?”

“거래, 말인가. 대체 왜…”

“나의 기억을 나눠주는 대신, 나도 그 기억을 받겠다는 것 뿐.”


그래, 단지 그것뿐. 앞으로 매 보름날, 이 곳 소택에서. 수긍하는 대답도 끄덕임도 없었지만, 경염이 거래에 응하였다는 것만은 린신에게 전해졌다.

끊임 없이 내리는 눈은 소택의 작은 술렁임을 고요히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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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멘트님 관글리퀘로... 랑야방은 처음이라 더 어려웠네요.

리퀘 내용은,

https://twitter.com/rument_ms/status/692541684945653760

어..음.. 그럼 엔딩 이후에 린각주가 비류와 같이 금릉에 왔다가 황제가 된 정왕을 만나는건? 추억에 젖어 소택 앞에 서 있던 정왕을 금릉에 온 김에 소택을 가보자 해서 발걸음 옮기던 각주와 만남~ (이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