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경환은 맨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금세 불편을 느끼고는 코트 밖으로 다시 꺼내었다. 언제나처럼 기다리는 시간은 길게 느껴졌지만, 때로는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조차 기꺼울 만큼.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추운 겨울의 칼바람보다도 매서웠던 건 그를 향한 시선들이었다. 하늘 아래 제 부모가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 하며 지내던 와중 찾아온 아비라는 사람은 큰 집에 저를 데려오고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집안 고용인들은 놀랄 일 아니라는 듯 무표정하게 거리를 둘 뿐이고, 어머니라 불러야 마땅할 분은 친절하긴 했지만 어딘지 모를 벽이 둘 사이에 놓인 것만 같았다. 고독이라는 것이 떠난 적 없는 생이건만 물질적인 형편이 나아졌대도 경환의 가난한 마음은 나아질 것은 없었다. 그렇게 외딴 곳의 작고 허름한 우물처럼 찾는 이 하나 없는 처지이건만 유일하게 자주 보아주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맏형이자 경환의 시선을 잡아 끄는 단 한 명의 사내, 경우였다. 절로 혀가 부드럽게 굴러가는 이름자는 경환이 소리내지 않고 즐겨 부르는 것이 되었다. 처음 무심히 고개만 끄덕거렸던 경우였지만, 적어도 적개심 대신 무심함이 깃들어 있던 시선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아무 감정을 갖지 않는 게 안심이 되었다. 제 아비의 집이라 하더라도 조심스러움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복도를 걸어갈 때에도, 물 한 잔 마시러 부엌을 들를 때조차 발소리 내는 것도 꺼릴 정도였다. 특히 경환의 발걸음이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경우의 방 앞을 지나갈 때였다. 아주 잠시 문 앞에서 멈춰 서 있다 천천히 그 앞을 떠나곤 했다. 그 문 너머 경우가 없더라도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더 오래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날도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한 번도 내밀어 본 적 없던 손으로 쥐어 본 손잡이는 금속 특유의 차가움만을 뽐내었다. 문 너머의 공간이 텅 비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열어보지 못 한 문, 경환은 그 날 이후로 그 문 앞에 서지 않았다. 스무살을 막 넘긴 경우가 이 집을 떠난 날이기도 하였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후계자로서 좀 더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경우의 청으로 쉽게 독립을 해버리고 말았다. 떠나던 날 잠시 경환에게 닿았던 시선은 따스함을 안고 있었지만, 경환의 찬 속내를 데우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적당한 온기를 담은 손이 잠시 경환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멀어져 갔다.
굳이 제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같은 지붕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약간의 행복이라는 사치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 사라졌기에 외로움은 더욱 커져갔다. 그저 형식적인 칭찬에 불과한 제 아비의 스쳐 지나는 말들은 순식간에 뒤로 잊혀지지만, 아주 잠깐의 미소와 눈짓은 경우의 것이었기에 더욱 오래 가슴 속에 머물렀다. 경환은 상대가 제 혈육이라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도리어 혈육이라는 것에 대한 실감은 거의 들지 않았다. 그저 부러운 사람, 동경의 대상, 따라잡을 수 없다는 약간의 자괴감만이 느껴지는 것이 전부였다. 점점 커지는 욕심을 모른 척 외면했다. 문 앞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이유를 모르쇠로 버텼다.
그렇게 경우가 떠난 집은 온기 한 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커버린 키만큼 늘어난 눈치로 겉으로는 적당히 칭찬 받으며 모난 구석 없는 것처럼 굴었지만, 가끔 경우가 들를 때를 제외하면 마치 바깥에서 홀로 찬바람을 맞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경환은 겨우 자각했다. 아니 깨닫고 있었으나 부러 눈을 돌리고 있던 제 기분을 인정했다. 스스로를 그대로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경우에 대해 품은 마음이 단순한 형제지간의 우애가 아니란 것을. 남에게 꺼내 보일 수 없는, 입에 담기 어려운, 감히 들켜서는 안 되는 마음을. 경우에게 모든 자신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열렬한 마음을, 절대 꽁꽁 숨겨두어야 할 것을 동시에 통감했다. 저절로 쫓아가는 시선을 관리할 수 있도록, 경우의 깊은 눈동자를 직시하지 않도록, 겉치레에 불과한 가족놀음에 아무렇지 않게 어울릴 수 있도록.
"오래 기다렸지?"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라 해도 지금 같은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자신만을 향한 미소라고 착각하고 싶어진다. 살짝 울 것 같은 기분이 들뻔 했지만 경환은 금세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너른 집안에 홀로 있을 때면 좀 더 나은 자신을 보이기 위한 훈련을 해왔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경우의 시선이 잠시 경환의 눈꼬리에 머물렀다 떨어졌지만 그마저 알아차리지 못 했다. 언제나처럼 경우의 코와 입 부근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뇨. 저도 이제 막 왔는 걸요."
"며칠 쌀쌀하더니 오늘은 좀 누그러져 다행이다. 기다리게 했다 감기라도 걸렸으면 어쩔 뻔했어."
"정말 방금 왔어요. 저 괜찮아요."
웃어 보이는 경환의 귀끝이 찬공기로 붉어져 있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슬쩍 그 등을 밀어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경환은 긴장으로 눈치채지 못 한 것 같지만, 항상 단정한 차림인 와중에도 귀 옆으로 머리카락이 삐죽 튀어 나와 있었다. 경우는 절로 손이 가려는 것을 참느라 주먹을 쥐어 주머니로 넣었다. 외투 주머니가 불룩해진 것을 곁눈질한 경환은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비단 둘 사이가 아니더라도 덩치가 다 자란 사내들이 서로의 손을 잡을 수는 없으니 어쩔 도리는 없었다. 사실 타인의 시선만이 문제가 아니긴 했다. 경환이 불쑥 손을 잡는 것만큼 경우에게 있어 황당한 일이 어딨겠는가. 다만 떠들썩한 연말 길거리를 오가는 다정한 사람들 틈에서 저도 같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잠시 들었을 뿐이었다.
“아, 이쪽으로.”
큰길도 인파로 북적이는 탓에 점점 차도 쪽으로 밀리던 경환이 마주 오던 사람과 부딪혀 비틀거리자 경우가 팔을 잡아 안쪽으로 이끌었다. 겨우 소매 위로 잡힌 손목인데도 뜨거운 족쇄에 묶인 것처럼 꼼짝 없이 이끄는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경환의 시선은 제 팔목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걷다가 갑자기 멈춰 전 경우의 등에 이마를 들이 박을 뻔 했다.
“이쁘네.”
“네?”
부드럽게 휘어진 경우의 시선이 다가와 경환의 시선을 잡아챈다. 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반짝이는 루미나리에가 장식된 작은 광장이었다. 이곳도 사람이 많긴 했지만, 오가는 사람보다는 조용히 이 곳의 광경을 즐기거나 천천히 거니는 이들이 많았다. 작고 반짝이는 빛들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별들 사이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런 날에는 다들 그러하듯이 경환 역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곁에 경우가 있다는 것도 한몫을 했다. 모처럼 둘만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꾸만 마음이 둥실둥실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풍부해진다. 경우에게 들킬세라 얼른 정신 차리고 얼굴을 가다듬곤 했지만, 이미 경우에게 모두 보인 후라는 건 알아채지 못 했다.
“날도 추운데, 어디 따뜻한 데 들어갈까?”
“네, 좋아요.”
어디든 좋지 않을까. 순순하게 대답만 하는 경환을 마주하며 경우가 멈춰 섰다. 예상 외의 행동에 놀란 경환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경우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놀라 원래대로 눈을 아래로 내리기 전에 경우의 눈이 크게 휘어지는 것을 보니 도저히 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기억하는 한 가장 크게 웃어주는 경우였다. 이유를 모르는 채 그 눈에 사로잡혀 멍하니 서 있기만 하다 경우가 입을 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경환아. 넌 너무 욕심이 없어.”
영문 모를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경환은 자신의 욕심이 너무 커서 차마 드러내지 못 할 뿐, 도리어 그 욕심에 침식당하지나 않을까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였기에.
“네가 원하는 걸 네 스스로 말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정말 네가 원하는 걸 말해보지 않겠니?”
“저... 저는 딱히...”
도저히 말할 수 없으니까, 스스로의 어두운 속내를. 하지만 경환은 부정하는 것조차 끝까지 할 수 없었다. 마치 자기 마음을 부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것만은 싫었으니까.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마음이라 해도 제 자신만은 그 마음의 주인으로서 버릴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가장 소중히 다뤄줄 수 있는 것이니까, 다른 이들은 더럽게 느낄지 모르지만. 하지만, 그 대상에게도 떳떳할 수 있을까. 경환은 겁이 많았다. 겁먹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 한 채 우물쭈물하는 경환을 보는 경우의 시선은 차갑지 않았다. 도리어 꽤 온기를 담고 있었지만 경환의 머리 속은 잔뜩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복잡해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 했다.
“어쩌면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을지도 몰라.”
흔들리던 눈동자가 차츰 안정을 찾았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단단하게 짙어지자 경우는 그제서야 자신 역시 긴장을 하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답을 구하고 있었던 것은 경환이 바로 그 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귀한 것을 얻기 위해 먼저 발을 내디딘만큼 원하는 답을 얻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저는, 원합니다. 형님의 마음을. 좋아합니다.”
드디어, 정답을 얻었다.
“형님께 죄송하지만, 거두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제 의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경우의 미소는 함박웃음으로 바뀌어 마구잡이로 터져나왔다. 오해로 경환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답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제 마음도 완벽하게 패배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와락 껴안은 경환이 영문을 몰라 그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경우의 단단한 팔이 주는 안정감과 웃음소리에 스민 온기에 그만 져버렸다. 그저 꿈만은 아니기를, 그리 빌며 제 팔로 조심스럽게 안았다.
“경환아, 이 형님은 참으로 겁쟁이구나. 네 용기를 보고서야 내 비겁함을 알아차렸어.”
“형님....”
“내 제멋대로인 마음을 네가 알아차린다면 아마도 내가 싫어질 테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아니. 넌 아직 몰라. 하지만 이젠 늦었다. 넌 후회하게 될 꺼야.”
아마 어쩔 수 없이 후회할 날이 올 테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경우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가졌다. 경환,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내 이기심이 발로된 시작이지만, 실은 그것이 목적이었을지 모른다. 경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커다랗고 탐욕스러운 검은 욕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아직 제 품에 안긴 경환의 뺨을 들어 입술을 내린다.
오가는 뜨거운 숨결이 하얗게 빛나며 결정이 되어 두 사람의 어깨를 하얗게 감싼다. 가볍게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거세질 때까지도 둘은 서로 떨어질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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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witter.com/offyourhand2/status/808170641593487360
그... 원래 겨울분위기 물씬 나는 데이트를 원하셨는데, 왜 이런 이상한 글이 되었는지... (오열
죄송할 따름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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