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뿌드한 몸을 일으켜 창문으로 향한다. 아, 미세먼지라니. 창밖의 부옇게 흐린 하늘에 절로 눈썹이 찌푸려진다. 모처럼 맞는 봄날의 주말이 이렇게 흐리다니, 아쉽기만 하다. 기관지가 약한 탓에 이런 날씨에는 외출을 삼가야 할 테지만, 백기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였다. 뉴스에 따르면 미세먼지 속에 1시간 있는 것만으로도 담배를 수십갑 피운 것과 마찬가지라는데, 그렇다면 정말 나가서는 안 될 터이다.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오늘은 해준과 처음으로 갖는 사적인 시간인 것이다.
비록 흐린 하늘이지만 차림새만이라도 봄 느낌을 담을 수 있도록, 그러나 너무 신경 쓴 티는 나지 않게 고르고 고르다보니 어느새 약속 시간이 코앞에 닥쳐왔다. 결국 평소처럼 완벽하게 빳빳이 세운 머리를 만들지 못 하고 나서야 했던 것이 내내 백기의 마음에 걸렸다. 대리님이 보시고 이상하다 그러면 어떡하지, 그런 고민을 하느라 코앞에 다가온 해준을 눈치채지도 못 했다.
“오늘 같은 날 보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해준이 왔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들은 첫 마디가 사과라니, 그제서야 백기는 저도 모르게 잡혀 있었을 미간의 주름을 펴느라 눈을 껌벅거렸다. 혹시나 날씨 때문에 밖에 나오기 싫어한 것처럼 비춰지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크게 말해 버리자 슬쩍 치켜 올라가는 해준의 한쪽 눈썹에 민망함이 몰려 온다. 아니, 정말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작게 덧붙여 보았지만, 그마저도 민망한 침묵이 좀 더 길게 유지될 뿐.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감조차 오지 않아 눈알만 굴리고 있자 그제서야 해준이 피식 웃는다.
“네, 알겠어요. 이제 그만 말해도 됩니다.”
“아니, 정말 아니니까요.”
“하필이면 오늘 날씨가 이래서 어디 실내로 들어가야겠군요.”
결국 가까운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좀 알아볼 것을, 혼자 영화관 가서 시간대가 맞는 걸로 보는 스타일이라 평소에 미리 알아보지를 않는 게 이렇게나 후회될 줄은 몰랐다. 취향이 확고한 편은 아니라 시간표를 보다 말고 슬쩍 해준의 눈치를 보았지만, 어느새 상영중인 영화의 포스터를 바라보느라 열중하는 해준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감상하고 말았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무슨 볼따구에도 눈이 달렸다, 투덜대려고 올라오는 말을 겨우 속으로 삼켰다.
“아닙니다, 대리님.”
“오늘 장백기씨는 아니라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는가 봅니다.”
순간 혼나는 줄 알았다. 그 말꼬리에 묻은 웃음이 아니었다면, 평소처럼 절여지는 걸로 오해할 뻔 했다. 어째서 이 남자는 자신에게 이런 기분을 들게 하는가, 고민이 되려 한다. 어쩌다 이런 점까지 좋아져 버렸는지. 백기가 생각하느라 묵묵히 있자, 해준이 갑자기 뒤로 끌고 매표소에서 멀어진다.
“어, 어어...? 어디 가요?”
“영화 보지 맙시다.”
“네? 왜요?”
영문을 몰라하는 백기를 이끌어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는지 묻는 백기에게 대답도 없이 주차장까지 가더니 조수석 문을 연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에 앉자 운전석으로 돌아와 벨트 맨 것을 확인하더니 바로 차를 출발 시킨다.
“저... 어디 가는 건가요?”
“집에 갑니다.”
조심스러운 백기의 물음에 해준은 도로만 살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니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헤어지는 건가, 그렇게 둘만 있는 게 별로인가 싶었다. 시무룩해 진 얼굴을 백미러로 본 해준은 그런 백기가 귀여웠다. 대체 묻지도 않고 속으로 꽁꽁 싸매고 고민하는 버릇은 대체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뜯어 고쳐 버리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괴롭히는 맛을 알게 된 것 같아 한동안은 그냥 둘까 싶기도 했다.
“처음부터 성급하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요. 내 집에 갑니다.”
“...네에?!!”
“오늘은 밖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네요. 아까부터 기침하는 것 같던데.”
“아...!”
간질거리는 목구멍이 참아보아도 도무지 힘들 때 작게 기침을 두어 번 했을 뿐인데, 기관지가 썩 좋지 못 하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자신 때문에 영화도 못 보게 된 것 같아 좀 더 어두워지는 백기의 얼굴을 보더니 결국 해준은 달래기로 하였다.
“백기씨 때문이 아닙니다. 저도 먼지 속을 다니는 데는 취미가 없어요. 나랑 둘만 있는 건 재미 없습니까?”
“아, 아뇨!”
그럴 리가, 명백한 의지를 품은 단호한 표정에 해준이 슬며시 웃는다. 별 것 아닌 작은 웃음이건만 왜 떨리는 건지, 백기는 서서히 고조되는 긴장감에 그저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애써 태연한 척 가장하였다. 하지만 첫 데이트-데이트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더 긴장되기 시작했지만,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혹시 대리님과 이런 저런 것까지 하는 게 아닐까, 불만인 건 아니지만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든다.
집에 간다는 말을 드고서는 입만 꾹 다물고 눈알만 굴리는 백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지만, 해준은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유로 긴장을 해주는 것이 오히려 즐겁다. 오늘은 그저 집에서 TV로 영화나 보며 치킨이나 배달 시켜 맥주라도 같이 마실까 정도의 생각 뿐이었는데, 저렇게 뻣뻣하게 굴고 있으니 괜히 건드려 보고 싶어져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애꿎은 운전대만 꽉 다잡고 한강변의 오래 되었지만 깔끔한 분위기의 작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주차하고 올 테니,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단지 입구에 세워두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차 뒷꽁무니만 보면서 혼자 서 있자니 너무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빨리 해준이 돌아왔으면 싶으면서도 어떻게 얼굴을 마주할지 고민 되어 최대한 천천히 돌아왔으면 싶기도 했다. 아마 해준이 1분이라도 더 늦게 돌아왔다면 그대로 아파트를 도망 나와 집으로 가버렸을지 모른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네? 제가 어떤 얼굴이길래...”
“안 잡아 먹습니다.”
해준의 한 마디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른다. 막 받아치려는데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바람에 나란히 서자 갑자기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다는 생각에 붉은 얼굴을 식히려 애쓸 뿐이었다.
“들어와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토끼같은 심정이었지만, 대리님이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게 합리화 하는 게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슬금슬금 머뭇거리며 들어서는 백기의 눈에는 의외로 여기저기 물건이 마구잡이로 쓰다 둔 것처럼 어질러진 거실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아...! 작은 탄식이 등 뒤에서 들려와 백기는 그만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느라 콧구멍이 움찔거렸다.
“뭐, 너무 깔끔하면 비인간적이죠. 잠깐만 기다려요.”
잠시 현관 쪽에 백기를 세워 두고 눈에 보이는 큼직한 물건들만 한켠으로 밀어둔다. 심지어 양손으로 옮기며 왼발로 슬쩍 밀어놓는 걸 보자 웃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 터져 버린 백기의 시원한 웃음에 해준이 한마디 던지려다 조용히 앞으로 다가가 팔을 잡아 소파로 이끌었다.
“너무 경계심이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러다 잡아 먹히면 어쩌려고.”
“안 잡아 먹는다면서요.”
“흐음, 맛은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순간 내려앉는 입술에 온몸이 굳어진다. 이런 나쁜, 확신남 같으니! 속으로 구시렁거려 보지만 결국은 저도 마중해 버리고 마는 제 혀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두 팔을 해준의 목에 감아 버린다.
이제 막 시작된 휴일의 하늘따위 흐리든지 말든지 더 이상은 알 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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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witter.com/rian5124/status/723498502647480321
관글 리퀘 당첨되신 리안님이 주신 키워드 "휴일"로 써본 단문입니다.
전 대리님 방이 더러운 게 좋아요. (무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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