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생

[석율백기] 파도 아래 꿈



햇살을 반짝거리며 반사하는 수면 아래로 푸른 바다의 깊은 속까지 비춰 보인다. 맑은 물은 그저 푸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치 보석 같기도 하고 때론 미지의 생명체처럼 살아 있는 것 같다. 투명해서 저 바닥까지 한눈에 다 들여다 보이는 바다를 보다 보면 절로 빠져 들어갈 것만 같다. 석율은 잔잔한 바다 위 서프보드에 엎드린 채 물 속을 하염 없이 들여다 보았다. 둥둥 떠다니며 멍하니 있노라면 자질구레한 근심걱정따위 다 잊을 수 있었다. 그때 뭔가 바닥에서 반짝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다시 보았더니 아무런 이상한 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물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았다. 보글거리며 기포가 얼굴을 간지럽혔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내가 피곤했나 보다, 생각하며 해변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오늘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석율이 제주로 내려온 것도 벌써 3주가 넘었다. 큰 맘 먹고 1달 동안 실컷 서핑만 하다 올라갈 작정으로 내려온만큼 매일을 거르지 않고 해변으로 서핑을 하러 나왔다. 매일 나오다시피 하니 해변 인근의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숙소로 돌아가면서 근처 식당에 들러 이른 저녁을 먹는 중에도 부지런히 자리로 와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은 왜 벌써 들어가?”

“이상하게 바다도 너무 잔잔하고 해서. 탈 수가 없잖아.”

“하긴 곧 태풍이 온다더니 오늘은 너무 고요하더라.”

태풍이 지나가면 서핑하기에 딱 좋은 파도가 된다. 그러면 평소보다 더 긴 보드를 챙겨 들고 나가 맘껏 파도를 즐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이면 돌아오곤 한다. 그러나 태풍이 한창일 때는 실내에서 시간을 죽이느라 좀이 쑤시는 것이다. 조만간 태풍이 온다는데 대체 왜 파도는 잔잔하고 맑기만 한지. 그래서 요즘 더 멍하니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다. 그냥 수영이라도 할까.

가벼운 짧은 바지에 해변용 슬리퍼를 끌고 다시 나섰다. 제주의 서쪽 해변은 바다도 일품이지만 석양이 너무 아름답다.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푸르렀던 대낮과 달리 서서히 붉어오는 햇살이 뒤섞여 점점 붉어진다. 피서철이 지난 저녁의 해변은 드문드문 지나는 사람들만 있을 뿐, 한여름처럼 번잡한 느낌은 없었다. 아직 밝다고는 하지만 물에서 놀던 사람들도 이제는 떨어진 기온 탓에 모두 돌아갔다. 천천히 모래를 차면서 걸어보다 까만 돌들이 가득 있는 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새까만 머리에 하얀 피부가 석양빛을 반사시키듯 빛나 보였다. 가만히 해변에 앉은 채 바다만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갔다.

“뭔가 재밌는 거라도 있어?”

물끄러미 올려다 보는 모습에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아, 또래처럼 보여서. 말 놓는 거 기분 나빠?”

조용히 고개를 젓더니 다시 시선을 바다로 돌린다. 반듯한 느낌의 옆얼굴은 한없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석율은 어쩐지 더 알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난 한석율이라고 해.”

다시 물끄러미 쳐다 보기만 하는가 했더니, 작은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바다는 너무 깊어서 그 속을 다 볼 수가 없어. 저 아래 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기다린다고? 누가?”

석율이 이름을 밝혔는데 갑작스레 이야기를 시작한다. 깊은 바다 아래까지 투명하게 다 보였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곳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다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 석율의 생각은 눈치채지 못 한 것인지 이야기를 이어간다.

“파도가 지금처럼 잔잔한 건 그가 잠들어 있기 떄문이지.”

“그는 대체 누구길래?”

“제가 저로 존재하던 순간부터 항상 그는 저와 함께 했었어요. 어쩌면 저를 만들어낸 조물주일지도 모르죠. 그의 곁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어요. 그 날까지는.”

푸르던 하늘이 붉게 물들던 것은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먼저 물들어 바다로 조금씩 번져오더라도 그 안의 깊은 곳은 짙은 푸름으로 깊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기는 언제 자신이 여기서 눈을 떴는지조차 기억하지 못 했지만, 깊고 푸른 어둠은 마치 자궁처럼 그를 편하게 감쌌었다. 그 속에서 백기는 평화로웠다.

그런 매일이 있던 날이 계속 되던 중 그들의 평화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영원히 안전하리라 생각했지만, 도륙에 의한 떼죽음을 그저 방벽 안에서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기의 만류를 거부하고 그는 붉게 물들어 버린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이별을 몰랐던 백기는 따라 나서려 했지만, 안전한 곳에서 자신을 기다려 달라는 말로 그만 묶여 버렸다. 처음으로 온전하게 혼자가 되어 버린 슬픔, 아픔, 고독 그리고 어둠.

석율은 백기가 하는 말의 반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멀쩡해 보인 데다 이야기를 하는 백기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오는 것에 넋이 빠졌다.

“그래서 그는 돌아왔어?”

“아뇨.”

“그럼 아직도 기다리는 중이구나.”

“네. 그가 절 기억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꺼에요.”

“그럼 매일 여기 나와서 기다리는 거야?”

“네.”

“여기서 매일 이렇게 바다를 바라보고?”

“바다... 바다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으니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바다를 응시하다 깜박 거릴 때마다 마치 바다를 향해 손짓하는 것만 같다. 석율은 그 손짓의 대상이 자신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곧 어두워질 텐데, 집에 안 돌아갈 꺼야?”

“집...”

희미한 웃음은 씁쓸해 보였다. 석율은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아까 그 얘기를 100% 믿지는 않더라도 장단을 맞춰 주려면 집 같은 현실적인 건 묻지 말았어야 했다.

“음... 그럼 내 숙소에 같이 갈래? 따로 있는 별채를 빌려서 사람이 더 와도 상관 없거든.”

석율을 돌아보는 백기는 이렇다 저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았기에 석율은 머쓱한 얼굴로 혼자 일어섰다. 하긴 요즘 여행지에서 사람 잘못 만나서 큰 낭패를 보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그렇지만 백기라고 말한 청년은 그런 느낌을 받지 못 했단 말이지. 한없이 고요하게 잠든 바다와 그 바다를 응시하는 백기의 등을 잠시 본 후 석율은 돌아와 잠에 빠졌다.

꿈을 꾸었다.

석율은 바다 속을 노니고 있었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태초의 모습 그대로 물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바다 속은 오롯이 저 혼자만이 존재하여 어느 곳을 다녀도 아무도 볼 수 없었다. 큰 외로움이 덮쳐 왔다. 한없이 푸른 바다는 석율의 외로움과 먹먹함을 위로해 주지 못 했다. 더 깊고 깊은 곳으로 향했다. 더 어두운 곳으로, 주변에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없는 곳까지 헤엄쳐 마침내 완벽한 곳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홀로 웅크리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잘 수 없었다. 가슴을 저미는 고독이 석율을 계속 일깨웠다. 그 고독이 너무 슬퍼서 석율을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물 속에서 흐르는 눈물은 따로 존재하지도 못 하는 것이라 석율은 그마저도 서러웠다. 몇날 며칠을 그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는 시간을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면 가까운 곳이라면 해와 달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으련만 석율은 저 홀로 깊고 어두운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못 해 터질 것 같을 정도로 고독이 커졌을 때, 석율은 제 눈물이 다 말라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을 때 눈 앞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을 깨달았다. 하얗고 눈부신 빛덩어리 같던 모습은 어느새 석율처럼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깜박거리는 눈은 아직 이지理智를 담고 있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막으로 쌓인 듯한 멍한 눈이었다. 석율은 곧 그가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 네 이름은 백기야.

- 백...기

석율의 말에 따라 뻐끔거리며 말을 하려고 애쓴다. 백기, 백기라고 자신의 이름을 여러번 되뇌이다가 석율을 바라본다. 방금 전까지의 눈빛이 아니라 똑바로 응시할 줄 아는 눈이었다.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듯한 그 눈을 보고 석율은 웃었다. 이 곳에서 홀로 있던 중 단 한 번도 웃음이 날 일이 없었는데, 그의 고독은 백기의 등장으로 사라졌다. 어쩌면 석율의 깊은 고독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몰랐다.

- 난 석율. 한석율.

다시금 그의 말을 따라 한다. 마치 어미를 처음 본 새끼마냥 석율이 움직이는대로 따라 움직이고, 말하는대로 따라 말한다. 석율은 매일이 외롭지 않았다. 가끔은 이 곳보다 조금 더 하늘과 가까운 곳까지 백기를 데려가기도 하였다. 여전히 그 누구도 없는 바다 속이지만 이제 석율은 혼자가 아니었기에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둘은 바다를 누비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석율의 세상은 이제 그와 자신 둘의 것이었다. 뭍에서의 삶도 이제는 자신이 꾸었던 꿈처럼 느껴졌다. 백기에게는 먼 이야기처럼 전해주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백기는 큰 호기심을 보였다. 나도 뭍에 가보고 싶어, 그런 말이 어느새 버릇처럼 백기의 입에 붙어 버렸다. 석율은 백기의 등장 이후로 처음으로 슬픔을 느꼈다.

백기, 내 백기. 백기야 넌 나를 버릴 거니? 차마 묻지 못 하는 질문들이 가슴 한 구석에 하나씩 쌓여갔다. 여전히 백기는 석율에게 딱 맞는 상대였다. 서로 맞닿는 입술도 빈 곳 하나 없이 딱 맞아 떨어지고, 서로 엉키는 팔다리도 어색한 구석 하나 없이 한 덩어리 같기만 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보다 뭍에 더 관심을 갖게 되다니, 석율은 다 아물어 버렸던 상처가 조금씩 다시 벌어지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백기를 위해 뭍으로 가는 방도를 찾아보는 것은 결국 자신을 버리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욕심이라는 것이 생긴 백기를 충족시키고 싶었다. 뭍은 의외로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가면서.

홀로 수면까지 올랐다가 내려오곤 하였다. 뭍에 가까운 곳으로 가니 이제껏 혼자인 줄 알았던 것이 무색하게 많은 물고기들이 자신을 반겼다. 하지만 자신와 함께 할 수 있는 이는 백기뿐이었다. 석율의 탐색은 점점 더 범위가 넓어졌고, 그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심지어 뭍에서도 바다 속의 이변을 깨달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고 백기를 데려오자, 그리 결심했을 때 석율은 미처 몰랐다. 그것이 백기와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탐색을 위해 나가려던 석율은 어떤 신호를 감지했다. 울음소리.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법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 잠깐 나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평소의 푸른 물 속이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붉게 물들어 오는 것을.

- 백기, 절대 여기서 나오면 안 돼.

- 어디 가는 거야? 나도 따라 갈래. 혼자 두지마.

-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 여기서 나가면 안 돼. 알았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거릴 때까지 백기를 잡고 계속해서 말했다. 석율은 유일하게 안전한 그곳에서 기다릴 백기를 위해서라도 빠른 확인을 해야 했다. 급격히 수면을 향해 헤엄쳐 올라가는 석율의 시야에 어른 거리는 것은 태양의 빛을 가리는 그림자였다. 그리고 등을 꿰뚫는 강렬한 고통. 석율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피로 바다가 물드는 것을 보았다.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이 서서히 그의 눈을 감겼다.

“헉...”

꿈에서 깨어난 석율은 제 가슴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당연히 매끈한 몸이었지만 그 속은 너무 아팠다. 찬 물을 한 잔 마시고서는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원래 시간대로라면 지금쯤 많이 밝아졌어야 하는 새벽이지만, 태풍이 올라오기 때문인지 아직도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답답한 속은 물 한 잔만으로는 풀리지 않아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걷다 보니 어느덧 낮에 백기와 만났던 곳까지 왔다. 어둡고 흐린 하늘과 바다는 마치 한덩어리처럼 보였다.

그 때, 분간이 어려운 와중에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흐린 회색바다인데도 푸르게 보이는 한 점이 보인다. 그리고 그 곳에 누가 있다. 석율을 응시하고 있는 그는 바로 백기였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데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눈, 코, 입, 표정,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들어온다. 석율은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선다. 이러면 안 된다는 이성이 내리는 경고는 제대로 해석도 되지 않는 듯 하다. 차가운 바닷물이 발목을 감아 올리자 석율은 좀 더 빠르게 나아갔다. 허리까지 물이 감기고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곳까지 가자 곧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헤엄치듯 나아가도 손끝에 닿을 것만 같지 닿지는 못 한다. 결국 물 속에서 고꾸라져버린 석율의 눈 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태풍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물 속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방금까지 닿지 않을 것 같았던 백기가 옆으로 와 석율의 손을 잡고 이끈다. 더 깊은 곳으로, 더 푸른 곳으로, 그들의 평화로운 둘만의 장소로. 드디어 충만해진 석율의 가슴은 크게 뛰었다.

다음 날, 태풍은 상륙했고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제 집에서 나오질 않았다. 며칠을 거센 파도가 사람키만큼 높게 솟아 올랐다. 서서히 잦아지는 바람과 파도 덕에 스릴을 원하는 서퍼들이 하나 둘씩 해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중에 석율의 모습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

웹진2기 : 주제=Blue (http://yull100webzine.creatorlin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