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본 하늘은 제 기분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물기, 비가 오는 거였을까 그렇잖으면 네가 흘리는 눈물이었던가.
“...기씨, 장백기씨.”
흔들리는 느낌에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시야는 아직 흐릿했지만, 부옇게 보이는 실루엣만으로도 자신을 부르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 이, 니...”
목소리는 거칠고 채 단어를 만들지 못 하고 흩어진다. 눈꺼풀을 깜박거리는 속도가 더해질 수록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확연해 진다. 영문을 모르는 두려움, 허둥거림 더해가는 당혹감이 드러난다.
“아, 한동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거라 합니다.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어요.”
하얀 가운과 모자를 쓴 해준이 낯설다. 겨우 눈동자만 굴려 바라보는 벽이나 천장 모두 하얗고 눈부시다. 백기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흐렸던 시야는 몇 번 껌벅거리고 나니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의문만 더했을 뿐이었다. 분명 내일 뵙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퇴근을 했던 것 같다. 엘리베이터를 탔고, 흔들렸다. 그리고 어둠.
그제서야 백기의 갈 곳 없이 방황하던 눈동자가 해준에게로 꽂혔다. 아마도 자신은 엘리베이터 사고를 당한 것일 터이다. 회사에서 생긴 사고이니만큼 사수인 강해준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제 휴대전화에는 가족들 연락처도 있고, 최근 통화기록에도 남아 있었을 텐데 가족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해준만 곁에 있을 뿐. 심지어 해준과 자신은 그럴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소리는 내지 못 하니 입만 뻥긋거리자 해준이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어쩐지 생소한 느낌에 그대로 쳐다보기만 하자, 백기의 손가락을 들어 그 위로 올린다. 작고 편평한 패드 모양인데 터치하자 햅틱 반응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게 뭔지 몰라 다시 고개를 돌려보자 해준이 지지대에 작은 모니터를 고정시켜 보여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두드리거나 글씨를 써보세요. 쉽지는 않아도 손가락 신경은 이상이 없다 들었으니까.”
백기는 그저 이 시스템 자체가 낯설 뿐인데, 해준은 그가 단순히 사고 후유증으로 바로 떠올리지 못 하는 거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패드에 손가락을 올렸을 때만 해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니, 답답한 마음에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손가락이 패드를 다루며 모니터에 글자를 띄웠다. 키패드를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모스 부호도 아닌 어떤 제스처가 글자로 변환되는 과정을 보며 백기는 놀라웠다. 대체 이 기억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자신이 기억하지 못 하는 건 또 뭐가 있을까.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왜 여기에 있죠?
“장백기씨는 어제 제어장치 이상으로 인한 작은 폭발 사고에 말렸습니다. 아직 정확한 원인 파악을 하는 중이지만, 당분간 ISS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ISS. 백기의 귀에는 생소하기만 하다. 그 단어만이 아니라 제어장치라던가 폭발 사고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백기는 퇴근 중 교통사고를 당했던 건 흐릿하게나마 기억했다. 폭발은 흔치도 않을 뿐더러 해당 차가 터졌더라면 뜨겁다는 느낌은 받았을 것이다. 적어도 구급차에 실려가기 전까지는 의식도 남아 있었으므로.
-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대리님.
백기의 말을 본 해준의 눈썹이 움찔했다. 이제는 백기와 다를 바 없이 의문투성이인 눈빛으로 바뀌었다.
“장백기씨, 아무래도 검사를 좀 더 해봐야겠군요. 일단 영사실에 먼저 예약을 해두겠습니다.”
멀어지는 해준을 말려보아도 이미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린 후였다. 백기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약이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것만 쳐다 보다 두 눈을 감고 머리 속으로 정리를 해보았다. 일단 지금 상황은 내가 이상하거나 대리님이 이상한 경우다. 하지만 사고가 난 것은 자신이므로 이상한 것은 나 자신일 것이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알아듣지 못 할 해준의 말이었다. 상황도 제 기억과 많이 달랐고, 심지어 ISS라는 게 어디 업체명인가 싶어 생각해 봐도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자신을 놀리기 위한 몰래카메라가 있나 싶었지만, 일개 회사원 때문에 그럴 리는 없으니 이 또한 아니다. 진통제 덕분에 통증은 전혀 없었지만, 전신을 다쳐 쉽사리 움직이지 못 하는 지금 상태로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없다. 그저 해준이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
약기운을 이기지 못 하고 백기는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침대 곁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한참 말 없이 백기를 내려다 보다 사라질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 하나 없는 새하얀 병실에는 시계조차 없었기에 백기는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숨을 뱉어 보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다만 갑갑증이 덜어질까 했던 행동이지만 오히려 몸이 자유롭지 못 하다는 갑갑함이 더해졌다.
그 때, 문이 열렸다.
해준은 혼자가 아니었다. 다양한 기구를 운반하는 사람들과 마스크과 모자를 착용한 하얀 옷의 사람들과 함께였다. 백기는 낯선 이들의 방문에 두려움을 느꼈다. 잘게 떠는 모습을 모를 리 없건만 해준은 아무런 내색 없이 백기에게 다가왔다. 체온을 재는 손길에는 아무 망설임도 없었으며 그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백기는 어쩐 일인지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실제로 울진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모함에 돌아가야 정밀 검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요청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 가능한 검사를 진행하고, 해당 결과는 제가 확인할 수 있도록 데이터 전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럼 검사를 시작하려고 하니 함대장님께서는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크지 않은 병실에 대여섯명의 장정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기에 그 요구는 이상할 게 없었다. 다만 백기에게 있어 유일하게 낯익은 얼굴인 해준이 사라진다는 것만으로도 그 두려움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었다. 겨우 움직이는 손가락이 해준의 손목께의 옷깃을 잡아 당기는 것이 전부였지만, 해준은 그 뜻을 알아차렸다.
“걱정 말아요. 금방 돌아올 겁니다.”
기어이 떼어내고 돌아 나가는 해준의 뒷통수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울컥, 뜨거운 것이 목구멍 너머로 치밀어 올라 소리로 터져 나온다.
“강해준!”
온몸 여기저기에 기다란 선들을 붙인 상태로 말도 제대로 못 하던 백기였지만, 그때만큼은 온몸에 힘이 들어가 제대로 단어를 뱉어낼 수 있었다. 검사를 위한 기계들은 삐빅거리며 경고음을 뱉어 내었지만, 백기는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침대를 벗어 나려다 그만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려 했다.
“조심해야지!”
간발의 차로 백기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을 막아낸 해준이 찌푸린 얼굴로 백기를 꾸짖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걱정에 차 있었기에 백기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겨우 그 이름 석자 외쳤다고 금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지 마요.”
속삭임과 같은 말에 해준이 그대로 일으켜 눕혔다. 멀어지는 듯 하던 등이 간의의자를 하나 집어 와 옆에 앉았다. 손등을 토닥여주는 규칙적인 박자에 백기는 서서히 잠에 빠져 들었다.
- 어서 돌아와요, 내 곁으로.
바로 옆에서 들리는 말이지만 마치 여기저기서 울리는 동굴 안처럼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백기는 깊은 휴식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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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내용 : 다시 만난 세계, 해피엔딩
대물님 리퀘가 넘 어려워서... 결국 주제도 제대로 못 맞춘 데다가 해피엔딩까지도 아직 멀었네요. ㅜㅜ
쓰다보니 점점 더 아무말이 되어 가는 터라 일단 여기서 멈췄습니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글을 다시 드릴 수있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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