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unfulfilled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어요?"
"...대리님 바쁘실까봐요."
살풋 웃는 기미의 말투로 대답해오는 너의 목소리는 전파를 통해 전해져오는 탓인지 힘없게 들린다.
"요즘 날씨가 오락가락 하던데, 감기 걸린 거 아닙니까?"
"아뇨... 혹시 제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리나요?"
"조금 힘이 빠진 것 같아서요."
"식사 전이라 그런가봐요."
방금 전보다 톤을 올린 목소리는 활발해 보였으나 말꼬리가 흐려지는 것이 여전히 기운이 없는 것 같다.
백기가 원인터를 그만두고 제주로 내려갔을 때에는 꽤 놀랐었다. 우선 내 스타일에 맞춰 부사수로서 일을 잘 해내고 있기도 했고, 남들 이상으로 일에 대한 욕심이 많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제주로 본사를 옮긴다는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고 했을 때에도 제 곁을 떠날 거라고는 예상치 못 했다. 비단 업무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도 자신과 같을 것이라 여겼었는데... 그래서 해준 자신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백기와의 통화가 시작된 것은 그가 원인터를 떠나고 한 달 뒤였다. 주말의 어느 저녁에 집에서 쉬고 있던 해준의 휴대전화 액정에 뜨는 발신번호가 낯설어 받는 걸 주저하다 통화한 것이 처음이었다. 해준이 알고 있던 번호와는 전혀 다른 휴대전화 번호라 의아한 생각도 들었지만, 회사에서 지원금이 나와서 변경하였다는 말에 납득을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통화는 바쁠 때에도 주에 1,2회는 꼭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번호로 해준이 전화를 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백기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이 잦았다. 불규칙적인 업종으로 이직한 것인지 평일 저녁에도 통화하기 곤란하다는 얘길 꺼내었기에 해준은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졌고, 요즘은 평일이라면 잠들기 전에, 휴일에는 해가 떠 있는동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마침 오늘은 토요일이라 밀린 집안일을 오전 중에 해치우고 느즈막히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서야 전화가 왔는데 아직까지 식사를 안 했다니. 요즘 들어 통 힘이 없는 것 같아 슬슬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대체 얼마나 바쁜 회사면 주말에도 제 시간에 밥을 못 먹을 정도란 말인가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껏 제 곁을 떠나 자리한 곳이 겨우 그런 덴가 싶어 슬며시 화도 치미는 것이다. 물론 제 사수로 일할 적에도 바쁜 건이 생기면 주말 출근은 물론이고 휴일이라도 야근까지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다 못 해 샌드위치라도 제때 맞춰 먹었던 것이다. 홀로 자취하는 백기가 바쁘니만큼 챙겨먹는 걸 게을리 할 수는 있을 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챙겨줄 수도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직도 점심을 안 먹고 뭐 했습니까."
질책하는 듯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본심은 걱정이 앞서는데도 여전히 가끔씩 본의 아니게 차가운 태도를 갖게 된다.
"오늘 늦잠을 자서 아침을 늦게 먹었어요. 그래서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주말인데 제때 식사를 안 했다기에 출근한 줄 알았습니다. 배가 안 고프더라도 조금씩 챙겨 먹어요. 몸 버립니다."
옆에 나도 없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주말에 푹 쉬는 것도 좋지만, 생활리듬이 깨지면 평일에는 더 고생일 게 눈에 뻔히 보이니까.
"하하. 네. 명심할께요."
"거기에서는 소일거리가 있습니까?"
내가 언제 내려가겠다 얘기한 적이 있었다. 평소 휴가를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이틀쯤 쓰는 건 일도 아니다. 주말에 휴가를 붙여 잠시 다녀올까 싶어 미리 운을 떼었더니 백기는 회사일이 바빠 통 시간을 낼 수 없다 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 다시 얘기를 꺼냈을 때에는 주말에 부모님이 오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본가 방문으로 육지로 나가 있는다질 않나 또 다른 때에는 친척이 방문해서 안내를 해야 한다던가. 그래서 직접 얼굴을 보지 못 한지 반년은 넘은 것 같다. 어쩌면 해준 자신을 피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제 마음을 눈치챈 백기가 도망가버린 게 아닐까. 그렇지만 이렇게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에 그런 의심은 사라졌다. 적어도 해준을 싫어하는 건 아닌 게 분명하였다.
혹시 제주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까. 점점 스스로가 치졸하게 느껴져 결국 해준은 더 깊이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연락이 지속되는 한 백기와의 끈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위안을 갖는다. 겨우 이런 통화 하나에 안도를 해야 하는 자신이 가끔은 의아스럽기도 하다. 대체 왜 백기가 옆에 있을 때 말을 하지 못 했었던가. 자신의 마음에 확신이 없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거절이 두려웠던 것일까. 타인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에 있어 탁월하다고 할 수 없는 해준이었기에 백기의 마음이 어떠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물론 호감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는 점을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기에 그래서 더 믿고 계속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렇게 긴장감 없이 지내왔던 것이 백기가 떠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 하는 지경까지 치닫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손에서 빠져나가는 옷자락의 끝을 억지로 쥐어잡듯이 저에게서 벗어나는 백기의 마음 끝자락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알고 있다. 그렇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해준은 그저 백기를 계속 잡고 싶을 뿐이다. 백기가 스스로 싫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 놓을 수 없다. 싫다 하더라도 놓지 않을 테다. 억지로 쥔 손가락을 하나씩 펴고 떼어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공기가 많이 차가워졌어요..."
"제주 날씨는 서울보다 많이 변덕스럽죠. 감기 조심해요."
"네... 대리님두요."
"저 이제 대리 아니에요. 그리고 그만둔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직급으로 부릅니까."
"죄송해요... 그치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이름 불러봐요. 편하게."
해준씨도 좋고 해준형도 좋고 그냥 해준아도 좋으니까 이름을 불러줘. 벌써 백기가 곁을 떠나고 세 번의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제는 관계가 재정의되어도 좋지 않을까. 설마 이름 불러달라고 했다고 버림받지는 않을까 해준은 마음 한구석에 커피얼룩마냥 진득하게 들러붙은 생각을 떨쳐버렸다.
"...ㅎ..해...아... 못 하겠어요."
풋 웃음을 터뜨리는 백기는 참으로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해준이 듣고 싶던 말은 아니었기에 그 웃음이 얄밉게도 느껴진다. 제 마음을 전혀 모르는데다 저에 대한 마음도 크게 특별할 것 없는 것 같아서 살짝 한숨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어금니를 살짝 앙다물어 누른다. 해준에게 의미있는 부름이었을테지만, 백기에게는 별 것 아닌 요청이었을테니.
요즘 들어 대화가 끊기는 일이 많아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백기의 말수가 줄어든 것을 느낀 해준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옛말의 힘을 새삼 느꼈다. 한때는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기도 했고, 목소리만으로 만날 때에도 가끔씩 경쾌한 웃음도 들렸으며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 때에는 살짝 빨라지는 말투가 참으로 귀엽기만 했다. 별 것 아닌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로도 쉴새없이 오가는 말들이었는데, 어느새 몇 마디 주고받다 보면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숨소리만 듣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아니 그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백기는 말수가 줄어들고 목소리가 작아진만큼 숨소리마저 들려주기 싫은가보다. 해준은 그럴 때마다 누가 손으로 가슴을 헤집고 폐부를 마구잡이로 잡듯이 갑갑하다 못 해 간헐적인 통증까지 오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모두 기분 탓임을 안다. 심장의 한 조각씩 떼어서 건네주다가 이제 손톱만큼 남아 너덜거리며 아프다고 외치는 것 같다.
"...지금 뭐 해요?"
"......"
이런 식으로 대답이 없는 시간이 늘어날 때면 해준은 늘 고민이 되었다. 전화로 더 할 말이 없다면 먼저 끊어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아직까지 해준이 먼저 끊는 일은 없었다.
"피곤하면 일찍 자요. 요즘 통 피곤한 것 같던데..."
"...네... 안녕히 주무세요..."
이제는 슬쩍 운만 떼어봐도 흔쾌히 전화를 끊는 것 같아 해준은 한계점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옛 사수와의 대화도 이젠 오래 참아주기가 힘든 정도의 마음만 남았나 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전화하지 말자는 얘길 할 수가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입 안이 쓰기만 하다.
며칠간 전화가 올 법한 시간을 피해 최대한으로 오래 야근을 했다. 바쁜 때에도 보기 힘든 것이 야근하는 강해준의 모습인지라 의아한 눈길도 많았지만, 하루이틀이 아닌 1,2주 단위가 되자 다들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주말에도 억지 약속을 만들어 외출을 하거나 폰을 꺼두게 되었다. 적어도 끊을 자신이 생길 때까지는 백기의 목소리를 듣기가 두려웠다. 나를 놓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게 될까봐. 어떻게 하면 되나고 다그칠까봐.
그렇게 피하기만 해서 될 일은 아니긴 하다. 평생 피할 수도 없고. 어차피 평생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미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피한 것이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었으니. 어쩌면 이제 정리를 할 때가 온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해준은 오랜만에 가만히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토요일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늦은 밤. 이때까지 전화가 오지 않았다니, 정말 백기는 저를 포기했구나. 이렇게 쉽게 끊어지는 연이었나 싶어 허망한 기분도 잠시, 어차피 마지막이라 맘 먹고 있었으니 먼저 전화를 걸기로 했다. 초반에 전화가 오갈 때 걸었지만 항상 바쁜 일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고 하였기에 이번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 rrrrrrrrrr
- 딸깍
"접니다. 강해준"
"......"
"... 내 목소리가 별로 듣고 싶지는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직접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습니다."
"......"
"그동안 통화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끝까지 곁에 있고 싶었지만... 이제 더 이상 의무감을 느끼지 말아요."
"......"
여전히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긍정도 부정도 어느 것이든 좋으니 마지막으로 백기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욕심이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침묵만이 해준을 맞는다. 그 침묵이 해준의 가슴 속을 무겁게 짓눌러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잠시 들었다. 공기가 잔뜩 들어간 풍선의 표면이 한계에 다다라 금이 가자마자 터져버리듯, 턱하니 막혔던 숨이 갑작스레 온 몸으로 터져 나온다. 축축하게 젖은 숨은 눈으로 빠져 나오면서 두 뺨을 적시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되었다. 숨을 들이쉬기 위해 한껏 벌린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 하는 울음이 새어 나온다. 제발 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는 마음만 남아 울고 울었다.
한 가닥 남은 숨마저 모두 뱉어내듯이 울고서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 들어버린 해준이 눈을 떴을 때, 아직까지도 통화중으로 표시되는 핸드폰은 뜨거워져서 배터리 수명조차 거의 남지 않았다. 귀에 갖다댄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빨갛고 가는 선으로 표시되는 배터리 잔여량이 마치 텅텅 빈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져 해준은 눈쌀을 찌푸리며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로써 끝이다.
벌써 겨울도 끝자락이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의 찬 기운도 매서움을 잃어 그저 마지막으로 부리는 심술 같기만 하다.
평소처럼 정시 퇴근을 하기 위해 코트를 걸쳐 입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휴대폰으로 잊지 못 하는 번호가 찍혔다.
받을까말까 고민하는 사이 전화는 끊어졌고 엘리베이터는 내려가 버렸다. 그 다음 엘리베이터로 내려와 정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오늘따라 바람이 조금 더 차게 느껴져 옷깃을 좀 더 여민 후 평소처럼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때 다시금 걸려오는 전화에 발을 다시 멈추고 말았다.
"...여보세요?"
"강해준씨 맞나요?"
낯선 목소리가 익숙한 번호로 나를 찾는다.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장백기씨가 남긴 게 있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네?"
남기다니?
무슨 말인지 의중을 헤어려보기도 전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 통화가 끝났을 때 해준은 그 자리에 서 있기가 힘들었다. 비틀거리며 옆의 건물 벽으로 기대서서 방금 전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장백기가 남긴 게 있다고 하였다. 자신을 떠난 시간동안 그는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거의 종일을 잠에 빠져 있고, 깨어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에는 몸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병마가 자라나기에 고통이 계속되는 병이었다고 한다.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백기는 그에게 전화를 해줬던 것이고, 전해주지 못 하는 편지를 쓰고, 언젠가는 전해 주겠다며 힘든 손가락을 놀렸다고 한다.
조용하고 한적한 간이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해준은 찌뿌듯한 몸을 잠시 바르게 폈다. 먼지를 날리며 떠나버린 버스는 하루에 네 대 밖에 운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며칠 휴가를 내고 내려왔기에 급할 것도 없지만, 해준은 발을 재게 놀렸다. 15분 정도 걸어간 곳에 문자로 받은 주소로 보이는 자그마한 단층건물이 보였다. 작은 거실 하나와 방이 두 개 딸린 건물과 작은 마당이 아늑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며 문을 열고 나오는 이가 바로 해준에게 연락했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밝히고는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은 기본적이지만 그마저도 여유롭지 않아 보이는 가구들 몇 개가 겨우 자리하고 있었다. 방으로 안내되어 훑어보니 침대와 서랍장, 침대 옆의 낮은 협탁이 전부였다.
그리고 협탁 위에는 투명한 유리병 한 가득 하얀 것들이 차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하얀 종이학들이 병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지만, 그 학들은 날개가 짝짝이기도 하고 접혀 있기도 하였다. 병 아래쪽에 깔려 있는 학들은 선명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건만. 서로 다른 학들의 모양에 의아하기도 잠시, 반대쪽 벽면에 붙은 종이에 적힌 걸 보고 해준은 눈을 의심했다.
- for 해준
이 종이학이?
"강해준씨에게 남긴 게 그 병이에요."
"..."
손끝에 걸린 종이에 적힌 글씨는 해준이 알던 백기의 글자가 아니다. 완벽한 외견에 걸맞게 그의 글자는 반듯하였지만 약간의 멋을 내듯이 날렵하게 옆으로 삐쳐 있었다. 하지만 종이 위의 제 이름은 마치 왼손으로 쓴 것처럼 초등학생이 막 배운 듯한 글자 같았다.
해준이 자꾸 종이를 만지며 들여다보는 걸 깨닫고서 안내인이 이야기해 주었다.
- 처음에는 빈병이었어요. 소일거리가 필요해 보여서 제가 종이를 가져다 주어더니 한두마리씩 접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러더니 어디선가 봤던 게 생각난다더라구요. 종이학 천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그래서 열심히 접었는데, 무슨 소원인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건강을 빌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병이 반 이상 차기 시작하니 이름을 하나 써서 붙이더군요. 이제 자기가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이렇게라도 그 사람이 바라는 걸 이뤄주고 싶다고. 이미 손가락은 점점 통증이 심해져서 예전같은 섬세한 손놀림이 어려웠는데도, 아픔을 참아가며 한 마리 접고 손가락을 주무르고 그랬어요. 깨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서서히 줄어드는데, 그럴 수록 더 열심히 매달리더라구요. 옆에서 말려보기도 했지만, 워낙 고집이 세서... 드디어 천마리를 다 접었다고 웃으며 잠들더니 그렇게 깨어나지 않았어요. 평소처럼 늦은 아침에 얼굴을 살피러 왔을 때에는 더 이상 깰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졌더군요. 더 없이 편안한 얼굴이라 도저히 깨울 수 없었어요.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나가던 이도 마지막에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는 것을 채 감추지 못 했다.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에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종이학이 가득 든 병을 안고 해준은 아침에 내렸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정류장의 작은 의자에 앉아 해준은 다시 병을 열었다. 제일 위에 놓인 가장 못 생긴 학이 눈에 들어왔다. 백기가 마지막으로 만든 종이학. 양 날개를 채 펴지도 못 한 채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학이 마치 너무 이르게 떠나버린 백기처럼 보였다. 학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해준은 병 위로 고개를 가까이 했지만 오히려 학의 모양이 더 흐려졌다. 어느새 제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물 때문에 흐려지는 작은 종이학들이 하나의 커다란 학처럼 보였다. 저 멀리 떠나버린 백기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기를.
고개를 묻고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한 해준의 앞을 마지막 버스가 지나쳐 간다.
고요한 과수원길 옆 간이정류장 의자에 앉아 우는 남자의 머리 위로 지는 해를 향해 크고 하얀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
시작은 진단에서...
https://twitter.com/SteelGay/status/568565861876764672
일주일내내 진도가 안 나가서 힘들었는데... 어떻게 끝을 보기는 했네요.
처음에는 백기 시점으로 썰을 풀었었는데, 쓰기 시작하니 이상하게 자꾸 해준 입장으로 떠올라 백기 생각이 너무 안 보이긴 하네요.
참고로 불치병 종류로 검색해봐는데, 딱 오는 건 없었고... 그나마 로스포트 증후군이라는 게 걸렸는데 이거 아무리 검색해도 원문이 없는 걸로 봐서 누가 꾸며낸 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본문에서는 병명을 열심히 피해갔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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