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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해준백기] 부식

해준백기 - 부식
미생 전력 60분 11국 - 롤리팝 기사 (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210601009 )


똑... 똑...

수도꼭지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진다.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싱크대에서 흩어져 사라진다. 메트로놈의 그것과도 같은 무기질의 울림은 어떠한 감동도 느낄 수 없기에 때로는 감상적이다.

처음에는 수도꼭지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새어나가지 못 하도록 잠그지 못 하는 것이 짜증스럽기도 했다. 수도세 걱정까지 할 정도의 형편은 아니었지만, 제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타고난 성정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해준은 어느 순간부터 싱크대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좋아졌다. 처음엔 플라스틱 바가지를 받춰보기도 했으나 물이 가득찬 표면을 때리며 흩어지는 소리는 비일률적이고 제멋대로라 바로 포기하였다. 부드러운 설거지용의 폭신한 스폰지 수세미는 계속 젖어 있어서 곰팡이가 쉬이 슬어버려서 치워버렸다. 결국 수도꼭지가 싱크대를 노크하는 쪽이 가장 견디기 쉽다는 걸 깨닫고 익숙해지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계속해서 두드리면 언젠가는 싱크대 너머의 배수관을 직접 마주할 수 있을까, 그런 작은 소망을 수도꼭지가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에까지 이른 해준은 잠시 스스로의 황당한 생각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단단한 벽과 같은 자신이 저 견고한 싱크대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든 쉽게 자신의 속을 보여주는 류의 인간이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해준이 둘러싼 껍질만을 두드리다 물러서거나 수많은 껍질 중에서 겉표면 정도만 깬 주제에 마음 깊은 곳까지 통하는 것처럼 굴곤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두드리는 경우도 간혹 나타났다.

성가시기는.
해준은 책상 위의 작은 추파춥스를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어째서 회사 다니면서 이런 걸 신경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듣기로는 여자들에게 준다는데 굳이 제 책상 위에 리본을 맨 채 놓여있는 막대사탕은 왜 여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아... 대리님, 그거 제가 둔 건데요... 신다인씨꺼 사니까 주더라구요. 두 개 받아서 하나 드린 거에요."

이젠 제법 제가 편해진 건지 옆에서 조잘조잘 말을 걸어온다. 업무를 가르치느라 한창 절일 적에는 눈밑에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와 젊은 사람이 간이 안 좋나 오해도 했었는데, 나날이 뽀얗게 물이 오른 화사한 얼굴은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해준이었다. 아직도 자신은 단단한 껍질을 여러 겹 두른 상태이거늘 저이는 단 한 번에 속살마저 찢어내고 심장을 다 드러내는 것 같다. 부드럽게 다가오는 기운이 피부로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만 꽁꽁 싸매고 있는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워진다.

부끄럽다니. 이제껏보다 가장 많이 자신을 드러낸 상대가 지금의 부사수인 장백기이다. 어쩌면 본인은 해준의 본모습을 안다고 여길 수도 있으리라. 하나의 꾸밈도 없이 다가오는 백기를 마주할 떄면 아직도 자기방어에 힘쓰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것일 테다. 30년을 살아오며 가장 먼저 배우고 가장 잘 하는 것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요... 어쩌죠. 단 걸 좋아하지는 않는데."
"아, 꼭 드시지 않으셔도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밝은 얼굴로 웃으며 대꾸하는 백기의 얼굴에서 저를 향한 배려가 읽혀지는 것이 싫다. 해준은 최근에 백기의 표정에서 그의 마음이 너무도 잘 보이는 것에 아직 익숙지 않았다. 노란 레몬맛 사탕을 서류가방에 넣은 뒤 남은 업무시간의 한참을 평상심으로 돌아가는데 힘썼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완벽히 일을 해치우는 강대리의 모습이었을테지만.



집으로 돌아온 싱크대에는 여전히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똑... 똑... 똑...

수도꼭지의 노크는 싱크대에게 닿고 있는 걸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바로 코트를 정리한 후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기를 통해 쏟아지는 물은 가늘게 분사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셔 내려온다. 가늘게 닿아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전신의 거품을 씻어 내려 하수구로 사라진다.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물은 결국 표면만 스치고 지나갈 뿐. 결국 싱크대에 떨어지는 물도 그처럼 물이 닿는 표면에 외피가 더 쌓이지 않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방으로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내일 아침 회의 자료를 볼 겸 가방을 열었다. 낮에 백기가 준 노란 막대사탕이 가방 한구석에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결코 사탕을 좋아하지 않는데, 저도 모르게 비닐을 까고 입에 넣는 자신에게 놀라며 빨기 시작한다. 역시 혀끝이 자극적으로 아려오는 단맛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중간에 포기하는 건 해준의 성격에 반하는 행동이다. 왠지 모를 오기에 해준은 계속 빨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지나자 혀도 적응한 건지 마비가 된 것인지 처음처럼 인상이 찌푸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속 빨다가 결국 사탕의 갈라진 틈에 혀를 베이고 말았다. 살짝 빨갛게 물든 상처가 따끔거렸지만, 녹아버리는 사탕의 반항이라 생각하니 승리의 단맛 같기도 하다는 엉뚱한 생각도 하였다.


다음날 아침, 언제나처럼 이른 시간에 이미 출근한 백기의 뒷통수가 보였다. 새까맣고 윤기 흐르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감싸고 있는 동그란 머리통을 보니 왠지 모르게 한 대 때려주고 싶어 손이 근질 거렸다. 어제 준 사탕 덕분에 혀가 베였단 말이죠,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는데 백기의 귀에 닿았나 보다. 화들짝 놀라며 일어서는 백기의 두 눈은 한껏 커져 있고,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고 있었다.

"아... 대리님, 정말 어제 막대사탕 때문에 다치셨어요?"
"그 정도를 가지고 다쳤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정말 드실 줄 몰랐는데... "
"마지막까지 잘 빨아서 먹었습니다. 너무 달더군요."
"끝까지 깨물지 않으셨어요? 대리님 대단하세요. 저는 반쯤 빨다가 깨물어 먹는데..."

뭘 그 정도로 대단하다고 하는지, 별 것 아닌 것에도 호들갑이라는 생각이 들어 도리어 민망해진다. 민망하다니, 정말 장백기 상대로 온갖 감정을 다 겪는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기사를 봤는데, 2500번은 핥아야 다 먹을 수 있답니다. 대리님 인내심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원래 빨아먹으라고 나온 막대사탕 아닙니까."

시키는대로 매뉴얼대로 하는 것이 강해준의 특장점 아니던가.

"...전 인내심이 약한 편이라..."

그야 잘 알고 있다. 인내심이 강했다면 저에게 그렇게 대들지 않았을테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해준을 알아차린 듯 백기의 귀가 빨개져 온다.

"아, 그렇지만 이젠 인내심을 더 키울 겁니다. 대리님도 다 녹는 날이 올 테죠!"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파이팅 자세를 취하는 백기의 마지막 말이 이상했지만, 해준은 단 걸 먹어서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500번의 시도로 다 녹아버리는 사탕과 달리 자신은 그만큼 버틸 자신은 없다. 계속해서 부딪치고 닿아오면 모든 껍질도 사라지고 자신도 변해버리고 마는 걸까. 이상야릇한 기분에 위가 울렁거리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오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수도꼭지를 새로 사야겠다.



+++


화이트데이에 이런 칙칙한 전력글이라니...!!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해준x백기가 아니라 수도꼭지x싱크대인 것 같은 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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