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석율] happily ever after
미생전력60분 - 3
화사한 꽃으로 장식된 길을 따라 걷는 신랑신부의 모습이 한없이 기쁘게만 보였다. 폭죽을 터뜨리며 웃는 신랑의 회사 동료들과 주변을 둘러싸고 박수를 보내는 신부 친구들. 어느 결혼식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다 흔한 연출된 행복.
삐딱한 생각으로 가득찬 머리 속과 달리 완벽한 웃음을 보이며 신랑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는 남자는 언제나와 같이 완벽한 헤어스타일을 뽐내며 밖으로 나섰다. 이대로 집에 가기엔 아쉬울만큼 화창한 봄날씨에 선선한 바람이 석율의 등을 떠밀어 어디론가 보내는 것 같았다. 그 길 끝에 있을 사람은 자신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테지만.
그는 요즘 한 남자에게 빠져 있었다. 처음 인상과 달리 알아갈수록 초기의 완벽함이 신기루였다는 듯이 허술함과 귀여움으로 점철되어 있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겨우 자신보다 한 살 어릴 뿐인데 자꾸 알아갈수록 큰 덩치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소녀가 눈에 밟힌다. 그 소녀는 올해로 벌써 스물 일곱이 된 장백기라는 건장한 회사 동기이지만. 그리고 자신에게 호감은 있어도 사랑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장애물인 것이다.
석율은 가벼워보이는 외견과 달리 사랑에 관해서는 진지함의 끝을 달리는 무거운 남자였다. 실제 과거 연인들은 그 무게에 짓눌리다 결국 그의 곁을 떠나가기 일쑤였고, 본인도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런 그의 좁아터진 마음의 문을 헤집고 들어온 것이 백기였다. 딱히 석율에게 특별하게 대하거나 한 적은 없다. 그저 회사에서 몇 안 되는 동기를 대하는 그 이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석율은 백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야 말았다. 아니 감추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하는 모습에 그간 왜 깨닫는지조차 몰랐을 장백기가 품고 있는 깊고 어두운 마음. 자신의 사수를 향한 단순한 동경 이상의 욕망을 품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석율이 느껴버렸다. 그 후로 자신과 같은 무게와 같은 질량으로 누군가를 대할 수 있는 그가 궁금해졌고, 그것이 자신을 향하기를 바라게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 백기는 오늘도 고민이었다. 날이 갈수록 해준을 향한 마음이 커져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엉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넘쳐 흐르다 못 해 이미 고인 물에 무릎까지 잠겨 있는데 도무지 그 물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매일 밤마다 꿈에서 만나는 해준은 날이 거듭되면서 그 본래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욕망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모해 있는 것이었다. 밤마다 그의 품에서 소리 지르다 아침이 되어 현실에 서고 나면 자괴감으로 하루가 엉망이 되었다. 어쩌면 해준이 눈치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회사에서 그를 대하는 태도도 점점 엉망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런 사태를 벗어날 구멍이라곤 보이지 않기에 절망한다. 그는 요즘 엉망이었다.
원인터 최고의 완벽남으로 꼽히는 강해준은 그렇기에 오히려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열렬한 마음을 받아본지도 오래 되었기 때문일까 옆자리에서 뜨거운 눈길을 보내는 제 부사수가 어떤 마음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처음의 시건방지던 자신감으로 가득찼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백기는 열렬한 시선만을 보내고 어떤 말이든 따랐다. 처음에는 자신만을 향하는 마음이 꼬리를 흔드는 대형견 같아 귀엽기만 하더니 요즘은 그 눈빛이 앞으로도 쭉 자신만을 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져갔다. 어느 순간부터 백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쓰고 있는 자신을 알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계속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탁월한 포커페이스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섣불리 자신의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백기조차 자신이 주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해준은 철저했다. 자신의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백기를 지켜보는 것이 이토록 즐거울 줄은 몰랐다. 그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었기에 백기가 스스로의 마음이 너무 차올라 제대로 숨을 쉬지 못 하는 상태라는 것도 쉽게 보아넘겼다.
조금씩 차오른 마음이 가슴팍을 건너 목에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백기는 해준의 곁에 있는 것이 여전히 기뻤지만 너무 힘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자신을 둘러싼 벽이 조금씩 깨어지려는 것을 깨닫지 못 했다. 어쩌면 빠른 결말을 원할 정도로 이대로는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랬기에 석율에게 빈틈을 허락했을지 모른다. 석율이 백기에게서 실금을 하나 발견했을 때에는 확신을 갖지 않았지만, 이제서야 자신에게도 기회라는 것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이 틈을 노리지 않으면 절대 백기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교묘하면서도 힘있게 밀어부쳤기 때문에 백기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석율이 한참 치고 들어와 있었다. 해준이 백기를 에워싼 물이라면 석율은 사지를 칭칭 감은 사슬 같았다. 처음이 있으면 다음은 쉬운 법, 백기는 지치는 마음을 석율과의 잠자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그저 섹스파트너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대하고 있지만, 석율의 눈빛에서 가끔 거울에서 마주치던 눈빛이 겹쳐 보여 그마저도 백기를 힘들게 하였다. 이제 마음이 해준에게 몸은 석율에게, 그렇게 양분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해준도 석율도 각자의 방식으로 제 마음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고, 이제 백기도 어느 쪽을 더 생각하는지 구분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 할 리 없는 해준이었다. 예전처럼 포커페이스로 무장하지 않고 대놓고 백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제와서 흔들릴 마음이었다면 뭣하러 그런 눈길과 몸짓을 보내왔던 것인가. 자신을 향했던 것과 같은 눈길을 석율에게 주는 것을 참고 봐주기 힘들었다. 참고 있던 두통이 치솟던 어느 날 해준은 자재실에서 백기를 탐했다. 그동안 참아온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백기의 안은 기분이 좋았고, 자신의 아래에서 우는 것조차 예뻤다. 예뻐서 더 화가 났다. 이미 석율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줬을 테니까. 그런 눈치조차 없는 제가 아니었다.
옥상에서 봅시다. 짧은 메모가 석율의 키보드 아래에 붙어 있었다. 성대리는 이미 퇴근하였고, 석율 역시 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백기를 퇴근길에 꼬셔낼 참이었다. 이 재미없는 글자의 주인공은 분명 해준일텐데, 자신에게 할 말이라면 백기 이야기일테지. 봄이 왔다고는 해도 옥상의 바람은 아직 차갑다. 재미없는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해준은 예전의 여유로운 느낌이 사라져있었다. 어쩌면 본인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백기에게서 손 떼, 평탄한 어조의 말투와 달리 표정은 일그러져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리라. 애초에 백기는 해준만의 것이었는데, 제 손에 넘어오도록 방치한 게 결국 해준 아닌가. 석율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으로 싫다고 대답하였다.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해준의 것 못지 않게 거칠었다. 결국 한밤의 옥상회담은 난투극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리고 둘은 깨달았다. 내가 떠날 수 없듯이 저이도 백기를 떠날 수 없겠구나.
백기는 해준과 석율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자신이 바보같았다. 하지만 둘 다 놓을 수가 없었다. 어느 한 명만 선택하는 것도 힘들었다. 차라리 해준만을 짝사랑하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스스로를 괴롭혔어도 타인에게 휘둘리지는 않았다. 힘든 것도 모두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버티기 힘들었어도 흔들림은 없었다. 마음 뿐만 아니라 밤낮으로 해준과 석율에게 시달리는 것도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들었고, 힘든 몸 때문에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둘 다 좋으면서도 둘 모두 다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복합적인 기분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지 몰라, 그런 생각으로 퇴근길을 나섰을 때였다.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석율과 해준을 만났다.
셋은 지금 백기의 방안에 있다. 도저히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 둘에게 떠밀리듯이 작은 원룸으로 들여보내긴 했지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둘을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둘은 이미 결정했으니 이제 장백기씨 결정만 남았군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해준이 말을 꺼내자 옆에서 석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우리 둘 다 합의했지. 완전히 가질 수 없다면 서로 공유하기로. 백기의 머리는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저 둘이 서로 뜻을 같이 할 만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한 백기가 멍하니 있자, 해준이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단 둘이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면 셋이 계속 함께하죠. 다른 편 손을 잡아끌며 석율도 한 마디 거든다. 셋이 행복해지자구.
양 손이 붙들려 이끌려가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보던 백기의 얼굴에는 어느새 100% 순도 높은 웃음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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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성공했다. 직접적 대사 없이 글쓰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이게 목적은 아니었음... 원래 미생전력 주제 3에 맞춰 셋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라 이런 심정으로 시작한 글이었는데...
다들 기대하던 부분은 코딱지만큼도 나오지 않은 것은 이게 다 제가 고자이기 때문...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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