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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해준백기] 미생전력60분_엘리베이터


"어우!!! 열받아. 대체 성대리는 약점이 뭘까??? 응???"

오늘의 커피타임도 성대리의 횡포에 열을 올리는 한석율의 외침으로 끝났다. 석율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영이와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격려하는 백기는 탕비실을 벗어났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한 석율의 옆에서 그래가 뭐라 말하고 위로를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아마 뾰족한 수는 없으리라.

그러고보면 강대리님도 약점이 있긴 한 걸까? 백기는 잠시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약점이라니. 원인터에서 빈틈 하나 없기로 유명한 완벽남이자 철강팀의 에이스인 제 사수에게 약점따위 있을 리 없지. 만약 약점이 있었다면 열심히 절여지던 시절, 자신이 눈치채지 못 했을 리 없다. 적어도 그때는 어떻게든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찾으러 열심히 관찰했으니까.

사우나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 백기에게는 많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
본인의 아집과 좁은 시야로 인하여 높은 자존심과 마냥 넘치기만 하던 자신감으로 무작정 앞뒤없이 사업계획서부터 들이밀던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하였고, 해준이 비단 업무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이었구나 싶어 호감도 생겼다.
스스로가 정해놓은 높은 기준을 모두 만족시키면서도 인격적으로 뛰어나기까지 하다니, 어쩌면 본인이 추구하던 모습이 실재하여 나타난 사람이 바로 그가 아닌가. 백기는 어느샌가 좀 더 사수를 만족시키고자 노력하였고 그를 닮기 위해 사사로운 것까지 따라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의식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백기가 자각하는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였다.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는지, 남들은 구분하기 힘든 해준의 포커페이스를 보면서도 기분이 어떠한지 알아볼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알아보는 것을 넘어서 제 사수의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고, 일이 맘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에는 백기의 기분도 조마조마해졌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강해준이라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나오지 않고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였고 효과를 보았다. 그렇기에 이제 와서 백기가 새삼 그의 약점을 생각해보려 해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백기씨, 오늘 외부 미팅은 같이 가는 것 알고 있죠? 5분 뒤에 출발합시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백기의 옆에 한동안 비어있던 자리의 주인이 돌아와 말을 건냈다.

"아, 대리님. 자료 준비 마쳤습니다. 바로 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얼른 가방과 코트를 챙겨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해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침 한 대가 15층에 도착하여 나란히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쿵-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더니 불까지 꺼져 캄캄해져 버렸다. 다행히 비상등은 커져 있다.
백기가 바로 비상버튼을 눌러 관리실에 엘리베이터의 고장을 알리자, 적어도 15분은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리님, 15분은 기다려야 한다는데 업체에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대리님?"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아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으나 불이 꺼진 실내에서는 해준의 옆모습만 어렴풋이 실루엣으로 보일 뿐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매일 바라보는 옆얼굴이다. 분명 그러할 텐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재촉해 본다.

"대리님? 일단 제가 업체에 연락부터 하겠습니다."

- 네, 네... 죄송하지만 저희가 출발이 조금 늦어질 것 같은데 미팅 시간을 조정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20분 정도 연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해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 동안에도 그리고 백기가 쳐다보고 있는 지금도 해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숨소리가 느껴져 백기가 다가가자 해준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리님... 혹시... "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걸까. 혹시 어둠이 무서운 건지 물으려던 마음이 들킨 걸까 싶어 백기가 주저하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대리님, 호흡이 거칠어지셨습니다."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어둡고 좁은 곳에 오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입니다."

"어둡고 좁은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하하."

농담으로 웃어 넘기려던 백기는 그래도 여전히 정면만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는 해준을 보고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래서야 15분까지 버틸 수 있을까?

"대리님. 사람들 올 때까지 잠시 앉아서 기다릴까요?"

"바닥에 함부로 앉지 않습니다. 더러우니까." 해준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대로 서서 기다리기엔 조금 피로하군요."

"대리님, 여기 앉으시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깔며 백기가 말했다. 더러운 건 워낙 싫어하는 깔끔한 해준이라 그냥 앉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장백기씨는 손수건도 갖고 다닙니까. 의외로군요."

저도 깔끔한 거 좋아합니다, 라고 대꾸려하던 백기는 입을 꼭 다물었다. 아까보다는 나아보이긴 했지만 해준은 다시 입을 다문채로 불규칙적인 호흡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왠지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어 불안해졌다.

"...대리님. 이렇게 하면 덜 어둡죠?"

휴대전화 플래시를 찾아 켜면서 백기가 씨익 웃어 보였다. 부자연스러워 보였으리라. 제 사수에게 웃는얼굴은커녕 미간에 주름이 가신 얼굴조차 자주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그제서야 정면에서 고개를 돌려 자신 쪽을 바라봐 준 해준의 표정을 보니 계속 멀대같은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관찰하고 지켜보면서 해준의 표정은 놓친 적이 없고 그의 기분도 모른 적이 없었는데, 이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어려보이게 하는 그 표정 때문인지 백기는 더욱 용기내어 벌떡 일어났다.

"대리님, 심심하시면 제가 노래 불러 드릴까요?"

뜬금없이 외치고 나서야 제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백기의 귓바퀴와 목덜미가 붉어졌다. 하지만 이제와서 물릴 수는 없지. 대리님의 무언이 승낙이라고 멋대로 정하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Are you going to Scarborough Fair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Remember me to one who lives there
She once was a true love of mine

가요를 듣지 않아 아는 노래가 없다는 낭패에 잠시 빠졌다가 평소 좋아하던 올드팝을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부르다보니 마지막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러고보니 해준의 옆에서 이렇게까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잘 부르네요."

노래가 끝나자 아까보다는 한결 편안한 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이번에는 백기가 해준 쪽을 볼 수가 없었다.

"한 곡 더 부탁하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군요."

해준의 말이 끝나고 머지 않아 바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AS 업체에서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모양이었다.

"다음은 밝은 곳에서 들려줘요."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에 백기가 해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때, 엘리베이터의 조명등이 들어왔다.

"아... 좀 눈부시군요."

살풋 눈을 찡그리며 미소지은 해준은 곧이어 열린 문으로 나갔다.

쿵.쿵.쿵.쿵.

백기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오른손으로 가슴께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폐소공포증이 옮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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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가요... 왠 전력이야 내 주제에. 엉엉. 퇴고 할 시간도 없다. 운다. 백기는 바보다. 그래도 노래는 잘 하겠지. ㅠ.ㅠ